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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급도 권위도 없다…연대로 쌓은 여성 서사 '마리 퀴리'
[라이브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폴란드발 프랑스행 열차. 꿈을 꾸는 소녀의 눈빛을 가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는 소르본 대학으로 향하던 첫 여정에서 운명 같은 한 사람을 만난다. “‘여자’가 왜 프랑스에 가냐”는 열차 안 남성들의 폭언과 차별의 시선을 받던 마리를 구한 당찬 소시민 안느 코발스키가 그 주인공. 시대는 여성과 계급, 직업과 신분의 선명한 경계 위에 있었지만 이들 사이엔 그 어떤 편견도 없다. 사회가 정한 다름에서 오는 권위도 없다. 과학자와 노동자라는 직업의 차이가 어느 한 쪽을 위축되게 만들지 않고, 다른 한 쪽을 가르치는 위치로 내몰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대등한 관계로 인식한다. 뮤지컬 ‘마리퀴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 마리를 연기하는 배우 김소향과 안느 역을 맡은 김히어라 배우는 이 장면으로 ‘마리 퀴리’가 나아갈 방향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마리 퀴리’(연출 김태형, 제작 라이브)는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로 원소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폴란드 과학자 마리 퀴리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이다. 이민자이고 여성인 탓에 무수히 많은 차별 속에서 과학자로의 삶을 사는 마리와 라듐 제조 공장에서방사능에 피폭당한 여성 노동자인 ‘라듐걸스’의 삶을 능수능란하게 직조했다.

[라이브 제공]

다시 무대에 오른 ‘마리 퀴리’ 초연과는 다른 진화를 보여줬다. 작은 차이가 ‘마리 퀴리’의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 의식으로 발전했다. 초연 당시 안느는 존경하는 과학자 마리에게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라듐을 발견한 과학자와 라듐으로 인한 피해자. 하지만 현재의 공연에서 두 사람은 ‘영혼의 동반자’로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을 돕는다.

안느를 통한 마리의 성장은 인상적이다. “라듐의 위해성이 밝혀지면 더 이상 과학자로서의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는 마리를 일으켜세운 것은 연대와 지지의 힘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리는 인간 본연의 불안과 과학자로의 사명감을 균형있게 보여준다. 배우마다 표현 방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다. 김소향은 초연에서의 고민을 바탕으로 마리의 표현 수위를 조절했다. 그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초연 때는 마리 퀴리가 라듐의 위해성에 노출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는데, 관객들을 설득시키지 못 했던 것 같다”며 “이번엔 마리를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그리면서도 너무 교과서적으로 선한 인물이 되는 것은 자제하며 선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김소향이 표현한 마리 퀴리는 과학자로의 신념을 가지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인물로 공감을 자아냈다.

그 곁의 안느는 마리의 성장을 돕는 인물이면서도 여성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라듐의 위해성을 은폐하려는 라듐공장 ‘언다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발로 뛰는 안느는 한 시대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항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뮤지컬의 주인공이 ‘마리 퀴리’인 만큼 시대에 맞선 평범한 소시민 안느의 성장 과정은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안느의 활약상을 보고 있으면, 문득 안느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배우 리사(왼쪽)와 김히어라. [연합]

작은 회전형 무대는 공간 활용도를 높였고, 객석과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배우들의 풍부한 감정 연기는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아름다운 넘버는 ‘마리 퀴리’의 ‘하드 캐리’다. 마리와 안느가 부르는 ‘그댄 내게 별’은 두 사람의 단단한 연대와 우정을 담아내며 탄탄한 여성 서사를 완성한다. 단지 무대에서의 연대만이 아니다. 공연 내내 객석에선 눈물이 떨어지고, 무대와 객석 간의 연대도 피어난다.

‘마리 퀴리’ 이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가 있었고, 그 옆엔 안느 코발스키가 있었다. 소르본 대학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주기율표에 서로의 이름을 적어넣던 두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각자의 이름을 빛내며 시대를 살았다. 이름은 언제나 타인이 불러주는 것이지만, 내 이름을 스스로 부를 때 삶의 진폭은 달라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 방향,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의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마리와 안느는 굳은 다짐을 하듯, 마음을 다잡듯, 희망을 그리듯, 스스로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났다. 누구의 별도 아닌 '스스로의 별'이 되는 장면이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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