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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공법과 신해통공에 묻는다…‘개혁’이 무엇입니까?

#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세종 9년(1427년) 과거시험에 출제된 문제다. 기존의 ‘손실답험법(損實踏驗法)’을 ‘공법(貢法)’으로 전환하는 개혁안에 대한 질문이다. 세종은 이것도 모자라 3년 뒤(1430년)에는 “여염의 세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라”고 한다. 이른바 전 국민 여론조사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였던 세제 개혁은 처음부터 기득권의 벽에 부닥쳤다. 세종은 과거시험을 통해 공법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고, 전 국민 여론조사를 통해 민생의 목소리도 들었다.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찬성을 받지 못하자 세종은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지루한 과정을 거쳐 공법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난 때는 세종 26년(1444년)이다. 공법이 처음 제기된 지 꼭 17년 만이다.

#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모두 통곡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같으랴’하였습니다….” 정조 15년(1791년). 좌의정 체제공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페지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정조가 당시 기득권을 이루고 있던 노론 벽파의 ‘돈 줄’ 역할을 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신해통공(육의전을 제외한 각 시전의 금난전권을 금지시킨 조치)’을 시행하는 데는 꼬박 3년이 걸린다. 3년의 시간은 공론화를 통해 노론 벽파 세력의 동의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점철됐다. 신해통공은 후에 “임상옥과 같은 평민 자본주의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복기대 단국대 석주선 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법과 신해통공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정책 모두 ①당대에는 사회를 확연히 갈라놓을 정도로 파괴력 있는 개혁안이었다는 점 ②두 정책의 밑그림은 민생 개혁에 있었다는 점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대에 부닥쳤다는 점 ④사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당대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여론조사 같은 공론화와 타협의 정치술이 발휘됐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현대의 정책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책에는 응당 ‘민생(국민)’이라는 목표점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엔 잃는 자(a)와 얻는 자(b)도 있다. a와 b의 무게를 재면, 통상 b로 기운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만유인력 법칙과도 같다.

그런데 요즘의 정책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우선 b가 불명확하다. 또, b라고 지목되는 이들은 대부분 “아니다. 불편하다. 별 이득 없다”고 한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있다. 심지어 무게 추가 a로 기우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b를 위한다는 게 오히려 b에게 손해를 끼치고, a가 득을 보는 것이다. 게다가 공론화의 과정도 없이 칼 자루를 쥔 쪽의 춤사위로 점철된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22일 국회를 찾아 경제 3법과 관련 “문제점들과 보완할 점들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면 거기서부터 얘기가 진전될 것이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세종과 정조의 민생개혁은 묻는다. 정녕 b를 위한 정책입니까? a와 b의 의견을 구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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