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울산김씨 진덕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했던 건물. [남도일보 제공]

신라 경순왕 차남이자 마의태자 동생인 학성부원군 김덕지를 시조로 하는 울산김씨가 서울을 거쳐 전남 장성 문정공 하서종가로 새롭게 세거한 과정은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를 낳은 여흥민씨의 여정과 관련이 있다.

학성부원군의 17세손 양주목사 김온(1348~1413)은 한성판윤 민량의 딸 여흥민씨와 혼인했다. 김온의 부인은 원경왕후와 사촌지간이다. 태종의 외척세력 제거때 김온도 화를 입는다. 이때 민씨부인은 세 아들과 함께 장성 맥동으로 몸을 피해 새 터를 잡은 것이다.

문정공 하서는 22세손 김인후(1510~1560)를 이른다. ‘동방 18현’으로 불린다. 대한민국 모든 법조인들이 최고 본보기, 청빈 대법원장 김병로(1887~1964)가 하서의 후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인 필암서원은 1590년 유림들이 하서 선생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1662년 왕이 필암 액호를 하사했고, 수차례 이건, 중건 끝에 1672년 황룡면 필암리 현위치에 왔다.

최근 문화재청이 제작한 K헤리티지 웹드라마 ‘삼백살 20학번’을 필암서원 등지에서 촬영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를 기리는 이곳은 호젓하고 세계유산 산책을 하려는 국민들의 지성미 넘치는 놀이터가 됐다.

세 아들을 데리고 장성에 온 여흥민씨 부인(1350~1421)은 터를 둘러보더니, “말을 탄 자손이 가득하고 5대 안에 현인이 나와 서원터가 될 것”이라 했다고 한다. 후손 중 최고의 사상가, 구국의 의병장들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은 현실이 됐다.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었다. 중종때엔 기묘사화때 억울하게 밀려난 사림의 등용문을 열도록 간언해 관철시켰다. 소윤-대윤싸움이 피를 부르자 미련없이 낙향해 학문탐구와 후진양성에 헌신했으며, 도학·절의·문장을 모두 갖춘 선비로서 성균관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김인후의 종형제이자 제자인 의병장 김경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김극후·김극순 형제와 함께 의병을 규합했다. 자신은 맹주, 순창군수 김제민은 의병장으로 추대돼 천안·용인 등지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두 아들은 진주성 대첩때 순국했고, 정유재란 때 안성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아들들의 원수를 갚았다.

가훈은 5교, ‘박학지(배우고), 심문지(묻고), 신사지(생각하고), 명변지(구별하고), 독행지(실천하라)’이다. 필암서원에 보존된 14책 64매의 고문서는 ‘보물 제587호’로 지정됐다. 함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