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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페스’·‘딥페이크’가 불러온 K팝 아이돌 성적 대상화 논란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팬픽’에서 시작한 알페스
오랜 팬덤 문화에서 성범죄로 소환
동성애 코드ㆍ노골적 성 묘사 논란
 
국민청원 등장 이후 ‘제2의 n번방’으로…
본질 흐리는 여성운동 백래쉬…자정 노력 필요
아이돌 팬덤 문화인 속칭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가 최근 K팝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사진은 그룹 더보이즈의 큐와 주연. [연합뉴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이돌 팬덤 문화인 속칭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와 디지털 기술로 합성물을 만드는 ‘딥페이크’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K팝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논란 때문이다.

논란이 커진 것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알페스와 딥페이크 이용자를 처벌해달라는 게시물이 연이어 등장하면서다. 특히 ‘RPS’는 1세대 아이돌 시절부터 존재했으나, 지난 20여년간 단 한 번도 휩싸인 적 없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를 통해 SNS 등지에서 은어로 쓰이던 ‘알페스(RPS를 빠르게 읽어 한글로 표기한 것)’라는 용어까지 회자되고 있다.

지난 1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미성년 남자 아이돌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알페스 이용자들을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19일 오전까지 참여 인원은 20만9700여명으로 늘었다. 청원 이후 알페스는 “성범죄가 아니”라며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청원도 줄을 잇고 있다. ‘여성 연예인들을 고통받게 하는 불법 영상 딥페이크를 강력 처벌해달라’는 청원글도 지난 13일 게재됐다. 해당 청원은 19일 오전 현재 37만 4000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딥페이크는 이미 관련 법안이 통과, 딥페이크 음란물을 제작, 유포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1997' 한 장면

▶ 팬덤 하위 문화 ‘알페스’가 뭐길래=“우혁은 거칠게 문틈 사이로 승호를 밀어 넣었다.”, “이러지마. 너에겐 칠현이가 있잖아.”, “넌 이제 나의 노예다.” (‘응답하라1997’ 중)

2012년 방영된 tvN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여주인공 성시원(정은지)은 1세대 아이돌 H.O.T의 열혈 팬이다. 수업 중 직접 쓴 팩픽(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창작소설)을 돌려보다 선생님께 들키는 모습은 아이돌 팬덤 문화를 단적으로 설명한 장면이다. 시원은 후에 방송작가로 성장한다.

‘알페스’는 실존 인물을 커플로 엮는 2차 창작물이다. 소설은 물론 그림, 영상 등을 포함한다. 1990년대 일본에서 유입, PC통신의 등장과 더불어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었던 팬덤에서 인기를 모았다.

대중문화평론가 미묘는 “알페스와 팬픽은 실존, 혹은 가상인물을 놓고 자의적의 해석을 하는 팬의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범위는 넓다. 국내에선 아이돌 팬픽이 잘 알려져 있지만, 많은 콘텐츠들이 RPS의 연장선에 있다. 해외엔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스타워즈’ 등의 작품을 두고 만드는 팬픽도 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커플링’이라고 해서 동성, 이성을 떠나 임의로 커플을 지어주는 시도는 굉장히 많았고, 과거부터 이어져왔다”라며 “유사 연애, 결혼생활을 그린 ‘우리 결혼했어요’와 같은 프로그램 역시 RPS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묘 평론가도 “영화가 열린 결말로 끝이 났을 때 관객들이 어떤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해석 행위의 일종을 RPS로 볼 수 있다”라며 “다만 가상 인물을 쓰느냐, 실존 인물을 쓰느냐가 팬픽과 RPS를 가르는 기준이다”라고 설명했다. RPS는 남성 아이돌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여성 아이돌의 알페스도 상당수다.

전문가들은 “RPS는 오랜 팬들의 문화이자 소비의 한 방법”(정민재 평론가)이자, “관계성에 집중, 대중이 상상을 가미해 여러 콘텐츠로 제작하는 것”(미묘 평론가)이라고 봤다.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국민청원

▶ 알페스가 ‘제2의 n번방’?=최근 ‘알페스’가 논란이 된 건 동성애 코드, 성 묘사 등 수위를 문제 삼으면서다. 국민청원에서도 “남자 아이돌을 동성애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차마 입에 담기도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변태스러운 성 관계나 강간을 묘사하는 성 범죄 문화”라고 적었다. 이후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알페스’를 제2의 n번방이라며 ‘성착취물’로 간주했다.

알페스 논란은 남성 가해자의 성착취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등장하는 여성운동의 ‘백래쉬(역습)’로, 성대결을 부추기려는 시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루다 페이스북 계정]

전문가들은 그러나 알페스를 ‘성범죄’나 ‘성착취’, ‘제2의 n번방’과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과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알페스가 성범죄로 소환된 과정 자체를 미심쩍게 보는 시각도 적잖다. 알페스 논란은 남성 가해자의 성착취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등장하는 여성운동의 ‘백래쉬(역습)’로, 성대결을 부추기려는 시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근 알페스가 수면위로 올라온 것도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의 성희롱 논란이 확산되면서다. 남초 커뮤니티에 게시된 ‘이루다를 성착취하는 법’ 등의 게시물이 비판받자 “알페스가 더 문제”라는 글이 등장하며 일종의 ‘맞불 전략’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n번방 사태 때에도 같은 주장이 제기됐으나 ‘본질 흐리기’라는 비판이 나오며 잠잠해졌다.

미묘 평론가는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나온 논란은 대상이 되는 아티스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팬픽이 여초 문화로 여겨지니 논란의 불을 지핀 것”이라며 “RPS는 팬픽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이며, 성적 지배구조가 성립하지 않는 창작물을 성범죄물이나 성착취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RPS를 음란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이는 남초 커뮤니티나 소라넷에서 돌고 있는 야설 등과 비할 데가 아니며 딥페이크와도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딥페이크의 경우 여성 연예인의 얼굴에 불법촬영물 등 성착취 영상에 합성해 유포하는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사이버 보안 회사 ‘딥트레이스(Deeptrace)’가 2019년 펴낸 보고서 ‘The State Of Deepfakes-Landscape, Threats, and Impact’에 따르면 딥페이크 포르노그래피 웹사이트에 올라온 영상 중 K팝 가수들이 등장하는 영상은 25%에 달한다.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도 페이스북에 “오래된 강간문화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만나 열린 ‘소라넷-디지털 성범죄-N번방’ 이후의 ‘이루다 사태’와 알페스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제2의 N번방’이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정 평론가도 “일부의 팬문화인 알페스를 중대한 성범죄나 반인륜 범죄인 것처럼 여론몰이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웹툰, 웬소설에도 자극적인 성묘사가 허다한데, 알페스에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YWCM연합회 관계자는 “대상화가 심해지며 명예훼손의 우려가 나올 수는 있지만, 알페스는 성착취나 성적 대상화와는 다른 사항으로 권력 관계를 반영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알페스가 “n번방 사건처럼 알고리즘에 의한 구조적 착취와 희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알페스의 이번 논란은 남성의 가해성을 벗어나려고 하는 맞불 전략이자 정치적으로 이용됐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알페스를 문제 삼는다면 그동안 수많은 게시판에서 이뤄지는 성적 상황이나 민감성에 대해서는 이슈화하지 않고 지금 이 시기에 알페스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방탄소년단(내용과 무관함)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제공]

국민청원 이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선 알페스 이용자를 상대로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가요계에선 알페스를 적극적으로 제지하거나, 이용자 처벌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알페스가 팬덤의 문화로 출발했으며, 충성도 높은 팬덤의 영향력과 확장이 그룹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공통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요기획사에선 그간 그룹 내 멤버들의 우정과 케미를 강조해왔고, 이를 대상으로 한 ‘팬픽’이 인기를 모으자 SM엔터테인먼트에선 2006년 소속사 가수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 공모전’도 열었다.

다만, 자극적인 성 묘사나 지나친 표현, 이미지 훼손 등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알페스는 인기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긍정적 스토리와 묘사는 환영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실존인물인 만큼 자극적인 스토리로 멤버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고, 원치 않는 스토리에 엮이며 이미지 훼손의 우려는 있어 자정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SM의 팬픽 공모전에서도 소속가수를 주인공으로 쓰되, “사회 미풍양속을 해하는 주제의 글은 제외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에 “픽션이다 보니 서사 구성 과정에서 당사자가 성적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생길 수 있다”며 “마이너한 팬덤 문화로 전체 팬덤이 부정적 시선에 서지 않도록 성숙한 팬덤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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