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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청자와 녹차

고려 인종 원년 1123년 5월 28일 송나라를 떠난 국신사(國信使) 일행이 개경에 도착한다. 거란과 여진이 버티고 있는 북방 땅을 지날 수 없었기에 바닷길로 왔다. 송나라 사신단과 선박 그리고 예물을 맡은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 서긍(徐兢, 1091~1153)은 7월 13일 고려를 떠날 때까지 보고 들은 바를 꼼꼼하게 기록한다.

새해 첫날 조정에서 하례를 받은 뒤 황제는 천하 지도와 호적, 곧 사해도적(四海圖籍)을 펼치고 왕공후백을 살핀다. 그래서 사신은 도적 작성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던 서긍은 그림까지 덧붙인 책을 지어 휘종에게 바친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 바로 그 책이다. 1127년 송나라 수도 개봉을 점령한 여진족은 휘종을 포로로 잡고 도성에 불을 지른다. ‘고려도경’도 불탄다. 지금 남아 있는 책은 필사본으로 그림은 포함돼 있지 않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청자에 대해서도 적었다. 귀인(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는 물병 정병(淨甁), 금색 무늬 검은 잔(金花烏盞)이나 작은 비색 찻잔(翡色小 ) 등 다구, 제작 기술이 정교하고 빛깔이 더욱 좋아진 참외 모양 도기술병(陶器酒尊), 정교하고 빼어난 도기향로(陶爐) 등 서긍은 고려청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색은 옛날 월주요 고비색과 유사하고, 모양은 요즘 여주요 도자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고려청자 색깔에 매료된 듯 고려 비색이 더욱 좋아졌다고 적고 있다.

옥으로 만든 찻그릇은 깨지기 쉬운 데다가 비쌌다. 월주요 장인들은 청자를 통해 옥색깔을 구현하고자 했다. 옥에서 신비한 기운이 나온다고 믿었기에 중국 귀족과 왕족이 무척 선호했다. 그래서 푸른 옥을 본떠서 청자 찻그릇을 만들었다. 다인들은 신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차와 찻그릇이 일체가 돼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월주요 장인들이 만든 청자 색깔은 옥그릇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 장인이 돌가루를 매만지고서야 비취옥 청사기, 비색청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릇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의종 11년 1157년 4월 1일 이궁(離宮)을 완성한다. 훗날 명종으로 등극하는 아우 익양후(翼陽侯) 호(晧)의 집을 빼앗아 지은 수덕궁(壽德宮)이다. 연못을 좋아했다. 민가 50여채를 허물고 연못을 판 뒤 관란정을 만든다. 새로운 물건을 좋아했다. 양이정을 짓고 청기와로 이었다((‘고려사’ 의종 11년 병신조). 형태는 덮는 기와지만 그 질은 청자와 다름없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1927년 강진 출토 청자기와편을 개성부립박물관에 보관·전시했다. 1966년 혜곡 최순우 선생은 강진군 사당리에서 청자기와 조각을 찾아낸다. 청자장 이용희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1927년 개성 만월대에서 수습한 청자기와 조각과 일치했다. 강진에서 만든 청자기와로 개경 황궁 양이정을 덮었던 것이다.

2021년 새해를 맞으면서 청자에 녹차를 담는다. 녹차 품은 청자는 고아하다. 청자에 담긴 녹차는 맑다. 고려청자는 차의 맛과 향을 살린다. 비색은 차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청자와 녹차 파란 마음은 자연으로 돌아가 정적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학과 구름을 메운 상감청자 잔탁에 담은 말차 한 잔으로 세상 시름을 잊는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맡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본다. 몸과 마음으로 비색청자와 푸른 녹차를 향유한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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