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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의 50가지 비밀](4)최초의 여성 골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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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에 걸린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의 초상화.


세계 최초의 여성 골퍼는 누구일까?

이 물음의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중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16세기 영국은 북쪽의 스코틀랜드와 남쪽의 잉글랜드로 나뉘어져 수백 년에 걸쳐 전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제임스 5세였다. 1542년 11월 24일 왕은 잉글랜드가 침략을 해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만 8,000명의 병력과 함께 총사령관으로 선봉에 서서 출격한다.

잉글랜드의 침략 이유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영국의 왕인 헨리 8세가 제임스 5세에게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신교를 채택하라고 종용했지만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의 삼촌뻘인 헨리는 조카가 말을 듣지 않자 스코틀랜드를 향해 진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야영 중이던 제임스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열사병을 앓게 되면서 출정한 지 2주 만에 30세의 한창 나이로 아깝게 전사한다. 고국 스코틀랜드에서는 왕이 전사하기 6일 전 왕비가 유일한 혈육인 공주를 출산한 터였다. 딸의 출산을 들은 왕은 내심 아들을 바랐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아듀, 안녕, 결국 우리는 공주를 얻었도다. 그 공주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처럼 제임스5세는 왕자가 아닌 공주의 탄생으로 인해 스튜어트 왕조의 종말을 예언한 것이었다.

선왕의 죽음으로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난 지 겨우 6일 만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이다. 퀸 메리는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살다가 가장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다 간 여왕이었다. 흔히 묘사되는 악한 여왕의 대명사인 훗날 잉글랜드의 ‘블러드 메리 여왕(Bloody Mary Queen)’과는 다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

선대 왕들의 피를 이어받은 탓에 메리 여왕은 거의 매일같이 골프를 즐겼다. 이 여왕이 공식적인 문헌으로 골프를 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혈통인 스튜어트 가문과 어머니의 프랑스 왕족 혈통을 메리는 물려받았다. 게다가 할머니로부터의 잉글랜드의 튜더 혈통 등 최고 왕족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성골이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한 혈통을 지닌 메리 여왕은 그러나 그 좋은 혈통이 훗날 여왕의 파국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태생부터 남다른 운명을 지닌 메리는 5살 때인 1548년 유학차 비밀리에 프랑스로 보내진다.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프랑스 출신의 왕비는 딸의 희생을 막기 위해 피신의 차원에서 행한 일이었다.

남성들의 로망 퀸 메리

메리는 당시 사교계에서 전 유럽의 미를 대표할 만큼 남성들의 로망이었다. 프랑스에서의 13년간 메리는 왕족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면서 재원으로 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전파되면서 한창 꽂을 피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사교계의 신데렐라였으며 왕족으로서, 최고 지성인으로서 모든 것을 접했다.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

16세에 그는 이미 178cn의 늘씬한 키를 자랑했다. 얼굴은 작고 목은 가늘고 길었다. 머리는 높았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 눈동자는 헤이즐 브라운 색이었으며 눈썹은 가늘고 짙었다. 16세기 시대의 풍만해야 했던 미인의 기준과는 달리 21세기 프랑스 모델같은 몸매를 하고 있었지만, 누구든지 그를 처음 보면 반할 만큼 놀랄 만한 지성과 미를 겸비한 여왕이었다. 오히려 메리로 인해 사회에서 여성을 보는 미의 기준이 변할 정도였다.

모든 것을 겸비한 메리를 프랑스 국왕인 앙리 2세는 며느리로 삼고 싶어했다. 메리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하길 국왕은 원했다. 앙리 2세는 아들인 프란시스 2세 왕자와 메리를 결혼시켰다. 정치적으로 두 나라 간의 정략 결혼이었다. 당시 주변 정세로 볼 때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동맹을 맺고 있던 시기여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고 이에 대비를 해야됐다. 메리의 어머니 역시 프랑스의 진골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골프를 치면서 사랑을 속삭였다. 프란시스 왕자는 상대적으로 평균치에도 못미칠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준수한 용모에 학식을 갖추었다. 메리가 16세였고 프란시스가 14세라는 한창 사춘기의 두 사람은 서로 간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골프장에서의 데이트는 사랑을 이루는 촉매제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골프가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초원에서 골프를 즐기는 메리 왕비의 모습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하나 둘씩 따라하면서 너도나도 골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골프를 전파한 주인공이 바로 메리 여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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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치는 메리 여왕.


캐디의 어원


메리는 골프를 칠 때,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경호원 겸 캐디로 채용하곤 했다. 생도들을 프랑스 말로 ‘카다트(Caddat)’라고 했는데, 이 말이 훗날 캐디(Caddy)의 어원이 됐다. 캐디의 어원이 바로 메리 여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메리는 골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메리 왕비의 공헌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벨기에, 이태리, 독일 등 이웃 유럽 나라에 골프가 급속도로 퍼졌다.

프랑스에서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결혼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1559년 첫사랑 프란시스 왕자가 뇌종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561년 메리는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접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만 했다. 더 지체 하다가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됨과 동시에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입지도 위태하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여왕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골프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메리의 남성 편력과 불행한 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골프를 즐기던 자유분방한 여왕

어느 날 궁중에서 여왕은 시중을 드는 집사장인 세턴에게 ‘내기 골프를 하자’고 제안하면서 오전 중으로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시중들을 이끌고 에딘버러 궁 인근의 글래스고골프장으로 나갔다. 이날 경기에서 여왕이 내기에 지자 상대인 새턴 집사장에게 선뜻 내기에 걸린 물건을 주도록 명령했다. 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서에는 ‘퀸 메리는 집사장에게 고가의 목걸이를 서슴지 않고 선물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골프를 즐기던 여왕은 그러나 이제 23세를 갖 넘긴 싱싱한 나이였다. 1565년 여왕은 3살 연하의 사촌 동생이자 왕족 서열에 있는 단리(Lord Darnley)경과 에딘버러의 할리루드 교회에서 두 번째 결혼을 올린다. 그러나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단리는 호시탐탐 왕위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견제하듯 메리는 또 다른 정부를 두고 있었다. 어느날 단리는 메리가 몰래 만나고 있던 정부를 죽였다. 이에 복수를 꿈꾸고 있던 메리 여왕은 또 다른 제3의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단리가 골프 라운드를 마치고 오던 어느 날 메리는 남편에게 근사한 저녁과 황홀한 밤을 보내면서 왕좌에 대해 전할 말이 있다고 꾀어서 그를 별궁으로 초대한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침실로 들어간 단리는 들뜬 기분으로 아내가 샤워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여왕은 뒷문으로 빠져 나갔고, 뒤이어 굉음과 함께 별궁이 폭파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을 꾀어 놓고 정부와 함께 침실에 폭약을 설치한 것이었다. 침실에서 벌거벗은 채 단리는 무참하게 사망한 것은 물론이다. 결혼 1년 만에 사고를 가장한 살인극이었다. 그렇게 남편이 죽은 뒤 3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메리는 당당하게 골프장에 나갔고, 담담한 표정으로 골프만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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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에 있는 메리 여왕의 시신.


단리의 죽음을 놓고 국민들은 수근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편의 장례식이 벌어지던 날 상주는커녕, 그 시간에 골프장에서 볼을 치고 있었다. 국민들의 신망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4개월 만에 원성에 못이긴 메리는 귀족들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고, 잉글랜드로 피신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몸을 의지한다.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교롭게도 당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동 시대의 두 여왕으로 고모와 조카 지간이었다.

엘리자베스도 메리에 못지않은 재원이었다. 그러나 도와주리라 기대했던 그녀는 정적인 메리를 성안에 연금시켜 버렸다. 차일피일 스코틀랜드의 복귀 만을 기다리던 메리는 세력들을 규합해 왕권 탈환을 획책하는 등 여러 차례 거사를 도모했지만 매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지막 거사가 드디어 메리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반란의 죄목으로 20여 년에 가까운 가택 연금 생활을 뒤로하고 1587년 2월7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죄목은 남편 살해에 대한 연루와 남편이 죽은 지 이틀 만에 골프를 쳤다는 괘씸죄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왕권 다툼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한 때문이었다. 중세시대의 로망이었던 최초의 여왕이자 최초의 공식 여성골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퀸 메리는 45세의 나이에 그렇게 쓸쓸히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의 형이 집행 될 당시 옆에는 키우던 애견만이 메리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온갖 추문과 사건으로 얼룩진 생을 살았던 여왕이었지만 골프의 대중화와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을 들라면 메리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런 메리의 열정 때문에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등 유럽 대륙으로 전파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인세(골프 역사가, 앤티크 전문가, 남양주 골프박물관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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