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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을 걸치면 5달러짜리 의사가운도 명품 그 이상


삶에 대한 경외심…패션은 열정이다


180㎝에 가까운 키에 10㎝가 넘는 하이힐을 신은 깡마른 여성 모델의 캣워크를 보면서 혹시 ‘패션’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 적 없는가. 저것이 ‘패션’이라면 나는 ‘패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만약 그랬던 사람이라면 ‘스트리트 패션’에 눈을 떠보라고 귀띔하고 싶다. 스트리트 패션의 권위자인 스콧 슈만이 운영하는 블로그 ‘사토리얼리스트(www.thesartorialist.com)’와 최근 국내에 출간된 동명의 단행본(윌북)에는 패션에 대한 색다른 정의와 다채로운 영감이 가득하다. 특히 천편일률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스트리트 패션인가

런웨이 패션을 실제로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런웨이 패션이 소위 ‘모델 체형’의 10~20대 연령층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매 시즌 새로운 유행 아이템으로 옷장을 채울 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더욱더 꿈꾸기 어렵다. 런웨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선보이는 패션은 말 그대로 ‘이상’이고 우리 삶의 터전과 결점 많은 개개인의 모습은 ‘현실’인 셈이다.

그 상호 불일치하는 ‘이상’과 ‘현실’을 자신에 맞게 변주하고 소화한 것이 바로 스트리트 패션이다.‘사토리얼리스트’가 소개하는 거리의 멋쟁이들은 나이, 성별, 인종, 직업, 학력, 소득, 사는 곳 등 모든 면에서 천차만별이며, 각자에 맞는 멋을 추구한다.  


스톡홀름에서 만난 청년의 예를 보자. 세련미 넘치는 초록빛 코트를 입은 청년을 보고 모든 이들이, 심지어 스콧 슈만마저 “프라다냐, 아니면 질 샌더냐”고 묻는다. 하지만 청년은 고가 브랜드에 대한 동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벼룩시장에서 5달러 주고 산 의사 가운”이라고 답한다. 슈만은 그 청년 사진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 청년이 이 코트를 입고 그렇게 멋져 보인 것은 코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느긋함 때문이었다”고. 누가 입느냐에 따라 옷이 달라보인다는 것, 유명 브랜드가 제시한 패션을 그대로 따라하면 ‘옷입기’가 그저 ‘흉내내기’에 그치지만 자신에 맞게 연출하면 진정한 ‘멋내기’가 된다는 사실을 길 위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패션은 유행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다

한 사람의 스타일은 그 사람의 외모뿐 아니라 내면의 개성과 삶의 방식, 가치관을 모두 함축한다. 즉, 스트리트 패션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이를 표현해나가는 ‘과정의 인간’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스트리트 패션에서는 삶에 대한 경외심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사토리얼리스트’는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인물에만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백발의 남성이나 주름진 얼굴에도 도도함을 잃지 않는 우아한 노부인을 자주 담아낸다.

또한 그들의 패션과 인생을 함께 비춘다. 밀라노에서 슈만이 만난 한 할아버지는 여든을 넘긴 듯 노쇠한 모습이지만 모자와 매치되는 체크 패턴의 재킷을 걸치고 자신이 연출할 수 있는 최고의 멋진 모습으로 산책하는 중이다. 이마가 벗겨진 한 중년 신사는 아버지한테 물려 받아 소매가 헤진 낡은 양복을 입고도 자부심 넘치는 모습으로 매력을 발산한다. 


스콧 슈만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옷이란 우리의 몸을 가린 천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까지 드러내고 삶의 무게를 담아내는 존재라고 말한다. 런웨이 패션이 우리에게 젊고 날씬한 몸을 꿈꾸게 한다면, 그가 제안하는 스트리트 패션은 자연스럽고 멋지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샤토리얼리스트’ 저자 스콧 슈만]


“런웨이 패션에 반기를 들어라”


패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스콧 슈만(Scott Schuman)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의류상품학을 전공하고 15년간 뉴욕 패션계에 몸담았던 그는 어느 날 런웨이 패션과 일반인들 옷차림의 간극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하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스트리트 패션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 9월 처음으로 패션 블로그 ‘사토리얼리스트닷컴’을 연 뒤, 하루도 빠짐없이 포토에세이를 올렸다. 뉴욕, 밀라노, 런던, 파리, 피렌체 등 패션계의 중심지를 돌아다니며 우연히 만난 거리의 멋쟁이들을 직접 카메라에 담고, 그들을 관찰하거나 인터뷰하면서 느낀 감흥을 솔직하고 소박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몸집이 너무 크거나 혹은 작아서, 혹은 뚱뚱하기 때문에 패션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는 여성들에게 “가장 큰 실수는 패션이라는 게임을 잡지 속 바싹 마른 열여덟살 소녀가 규정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 후 4년여, 스콧 슈만은 지금까지 대접받지 못했던 ‘스트리트 패션’의 위상을 명품 브랜드 패션 못지않게 끌어올렸다. 그의 블로그는 2010년 전 세계 500여 패션 블로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로그 1위에 올랐으며, 그가 찍은 거리 멋쟁이들의 사진은 ‘보그’ ‘GQ’ ‘ 판타스틱 맨’ ‘엘르’ 등 세계적인 패션 잡지에 꾸준히 실리고 있다. 

지난해 그가 가장 아끼는 사진 500개를 골라 단행본으로 묶어낸 ‘사토리얼리스트’는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베스트셀러 패션 부문 1위에 올랐으며, 국내 패션 마니아들까지 한국어 번역 출간 전에 원서로 공수해 읽을 정도로 열풍을 몰고 왔다. 

블로그와 책 제목인 ‘사토리얼리스트(Sartorialist)’는 ‘재단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사토르(Sartor)에서 파생된 단어다. 자신의 개성을 고유한 스타일로 표현하는 신사를 의미한다. 국내에서도 슈만의 ‘샤토리얼리스트’는 도서출판 윌북을 통해 최근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김소민 기자/som@heraldcorp.com
[사진제공=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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