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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함영훈> 무연고 묘소 보듬어 주는 인정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추석 전 소분 안하민 자왈 썽 멩질 먹으레 온다.”

소분은 벌초(伐草)를 뜻한다. 추석 전에 벌초하지 않으면, 조상이 풀 덤불 쓰고 고생고생하며 명절 차례상 먹으러 온다는 제주도 속담이다. 경기도에도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 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가위가 되기 전에 조상의 흔적을 정갈하게 가꾸는 의식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당일치기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손주가 태어나면 “내 무덤에 풀을 뜯어 줄 놈”이라고도 했다. 벌초는 농와지경(弄瓦之慶:여식이 태어난 기쁨), 농장지경(弄璋之慶:사내가 태어난 기쁨)을 표현하는 소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저승에서 한가위가 되면, 염라대왕은 저승문을 열어 혼령들을 저마다의 고향으로 보낸다. 나가기를 주저하는 한 망자(亡者)가 있어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는 “내 무덤에 풀도 깎지 않았는데, 명절이라 찾아간들 무슨 대접을 받게 될 것이냐”면서 그냥 주저 앉았다는 얘기도 있다.

‘처 삼촌 묘 벌초하듯’ 대충하는 것도 눈총을 사지만, 수년간 외면하다 조상묘가 잡풀이 무성한 ‘골총(骨塚)’으로 방치되면 온 동네 망신을 당하게 된다.

‘제사 안 지낸 것은 남이 모르고, 벌초 안 한 것은 남이 안다’는 속담에서 처럼 제사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벌초에 부여하기도 한다.

선조들은 벌초를 음력 7월보름 백중부터 시작해 한가위 이전에는 끝냈다. 풀에 이슬이 맺히고 이삭이 영근다는 백로는 때마침 주말이라 전국의 도로에 벌초 귀성차량으로 가득했다. 대리벌초가 늘어난 것은 바쁜 도시민들에게 어쩔수 없는 세태이다. 그래도 대가족 단위로 이동하는 ‘모듬벌초’ 성묘 행렬은 세 과시하듯 가족의 화목을 자랑한다.

벌초의 훈훈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양제철소 직원들은 7일 찾아오는 이 없이 방치된 공장 인근의 무연고 묘지의 벌초와 공동묘역 주변을 말끔히 정돈했다. 광양제철소 직원의 무연고 묘 벌초는 벌써 25년째이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이장협의회, 홍성읍 새마을지도자회와 이장협의회 회원들, 은하면 자율방법대는 최근 무연고 묘소 수백기에 대한 벌초작업을 벌였다.

충북 음성군 금왕읍새마을지도자협의회는 최근 무연고 묘소 3000여기를 벌초하느라 며칠 간 땀방울을 흘렸다. 50명이 그걸 다 했다. 강원도 횡성경찰서 비번 근무자들도 주말인 지난달 28일 개전리 공동묘지에 있는 무연고 경찰관묘를 벌초했다.

경북 안동·임하호 수운관리사무소 직원들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몰지역 벌초·성묘객을 배 여덟 척으로 댐 내 골짜기에 실어 나르느라 휴일을 잊었다. 한명이라도 고립되면 안되므로 3800명이 모두 귀가할때까지 기다리는 수고로움도 아끼지 않았다.

벌초는 어느덧 가정의 화목을 넘어 이웃 사랑으로 번지고 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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