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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로 나뉜 마을’…그 사이로 부는 찬바람
겨울이 절망인 사람들…화마가 휩쓸고 간 구룡마을
주택 문제 원점으로 돌아갈까…화재 현장 잔재 처리도 못해
모든 걸 잃고도 제 목소리만…이재민들 갈등의 골만 깊어져


“아침에 일어나면 빨래가 까맣게 타 있어, 호흡도 답답하고...잿더미가 된 집을 치워줘야 되는데 안치워주니까...”

이운철(58) 씨는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2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 씨는 매섭게 불어닥친 겨울 바람이 두렵다. 바람이 불면 화재가 난 8지구의 잿가루가 집으로 고스란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씨는 “잔재 처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화재가 아니라 집”이라며 “원래 살던 곳의 잔재를 청소해서 아예 집의 흔적을 없애버리면 주택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갈까 두렵다”고 말했다.

동장군이 막 찾아온 지난 주말, 구룡마을은 평소보다 고요했다. 지난 달 마을을 휩쓴 화마 때문에 63세대가 집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포중학교 이재민 대피소에는 화재로 집을 잃은 100여 명의 구룡마을 이재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춥고 배고프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보다 삶의 터전”이라고 말한다.

이 마을에서 25년 째 목회활동을 해 온 이병주(50) 목사는 화재로 사택과 교회를 모두 잃었다. 8지구에 위치한 140평(462.8㎡) 규모의 교회는 화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 씨와 아내, 어린 두 남매는 한 달 가까이 마을 초입의 마을회관에서 지내고 있다. 이 목사는 “입고 있던 옷을 뺀 모든 걸 잃었다”며 “이재민에게 마련해주는 임대주택이 우리처럼 목회활동을 하는 집에는 맞지 않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마을회관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개포중학교에는 또 다른 임시대피소가 있다. 이 곳에는 46세대 91명이 머문다. 개포중학교는 강남구가 지정한 공식 대피소로 구호물품이 직접 도착하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제 집을 잃고 100여 명의 사람들이 한데 살다보니 불편할 수밖에 없다. 8지구 거주민인 유성복(54) 씨는 “안에는 따뜻하게 해 줘서 괜찮지만 겨울이라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어 공기가 탁하다”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이 목사와 유 씨가 화재 후 이렇게 서로 각각 다른 곳에 머물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마을회관 대피소는 주민자치회, 개포중 대피소는 마을자치회를 중심으로 임시대피소를 차렸다. 양 측은 구룡마을 개발 방식을 두고 이견이 있다. 주민자치회 쪽은 서울시의 환지혼용방식(일부 토지를 소유주가 직접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마을자치회는 강남구의 전면수용방식을 지지한다. 화재 직후 양 측이 각각 다른 대피소를 마련할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다.

이런 가운데 화재가 발생하면서 주민들 사이에는 불안함이 엄습한 상황. 지난 8월 도시개발구역 지구지정이 해제되면서 이재민들은 도시개발법이 아닌 긴급복지지원법에 의해 보상을 받게 됐다. 이 경우 구룡마을이 개발돼도 이재민은 임대주택 1년 거주만 지원받을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화재가 난 현장의 잔재를 처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다. 1년 후에는 구룡마을로 돌아올 수도, 보상을 받을 법적 근거도 사라진다.

지난 1일 이재민들이 서울시청에 찾아가 “서울시와 강남구는 이재민과 이재민이 아닌 거주자에게 차별없이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한 탓에 서울시가 “이재민에게도 현지 개발 때 세워질 임대주택 입주를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개포중학교에 머물고 있는 이재민들은 11일까지 학교를 비워주고 지정된 임대주택으로 떠나야 한다. 개발방식을 두고 으르렁 거리지만, 모두들 소방도로조차 없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 마을에 ‘안전’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유 씨는 “서울시와 강남구가 싸우고 있는 지금 현재, 우리 이재민은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며 “서울시와 강남구가 빨리 합의해 이재민을 이주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지혜 기자/gyelov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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