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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카페] 찰나의 순간 엿보기… 단편소설의 미학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단편소설의 미학은 짧은 이야기 속에 삶의 비의나 아이러니, 인간 본성의 이면을 찰나의 순간에 날카롭게 포착해냄으로써 섬광같은 반짝임을 제공하는데 있다. 집중해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작은 균열이지만 작가들은 예민한 촉수로 알아채고 그 이면을 벗긴다. 그렇게 들여다본 속은 폐허가 돼 있기도 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로 통하는 새로운 발견이 되기도 한다.

새로 나온 소설가 권여선과 조경란의 신간 소설집은 그런 기대를 갖게 한다.

권여선의 다섯번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는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발표한 단편소설을 묶었다. 흔히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산다는게~’란 화두를 집요하게 붙잡고 작가는 인생 혹은 운명의 가차없음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단편 ‘봄밤’은 사소하게 어긋난 인생이 마치 작정한 듯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어떤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는지, 미세한 균열만으로 생은 얼마나 쉽게 산산조각이 나는지 보여준다.

스무살에 쇠를 다루는 일을 시작한 수환. 열심히 일해 용접소를 차려 돈을 벌지만 부도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다. 교사생활을 하다 이혼하고 아이까지 빼앗긴 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은 학교도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대학동창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수환을 만난 그녀는 술에 취해 수환의 등에 업히며 ‘뜻밖의 행운’에 의아해한다. 동거에 들어간 둘에게는 곧 치명적인 상황이 닥친다. 수환은 류머티즘으로, 영경은 알콜중독으로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병실이 다른 둘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영경은 술을 마시러 외박을 나가고 수환은 끝내 숨을 거둔다. 응급실로 실려온 영경은 알콜성 치매로 수환의 기억마저 아득하다.

소설 ‘이모’에도 끊임없이 가로막는 불행 앞에 맞선 인간의 작은 투쟁(?)이 그려진다.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 홀로 사는 시이모는 50세까지 가족들 뒷바라지와 빚가림에 치인 삶을 살다 결심한다. 찾지 말라는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떠난 것.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1억원 보증금의 작은 아파트에 홀로 살며 나머지 5000만원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한 이모는 췌장암으로 죽기 전까지 단순한 생활을 한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열시쯤 도서관에 가 책을 보고 점심때 쯤 집으로 돌아와 점심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가 문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다 오는 일상이다.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고독하고 자유로운 삶을 택한 그녀에게 어느 날 한꺼번에 많은 일이 벌어지고 타인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기 시작한다. 



권여선의 이번 소설집에는 술 마시는 주인공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마신 습관화된 술은 그들을 불안과 후회, 기억상실로 끌고 간다. 이들의 견딞은 너무 취약해서 끝내 끊어지고야 만다는데 냉혹한 작가의 시선이 가 있다.

조경란의 짧은 소설집 ‘후후후의 숲’(스윙밴드)은 원고지 20매 내외 아주 짧은 이야기 31편으로 구성돼 있다. 단편소설 보다 더 짧은 이야기는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눈은 물론 유머와 풍자, 반전을 굴릴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백설공주 유모와 (몇 번째인지도 모를) 난쟁이’ 이야기는 백설공주의 유언을 전하기 위해 유모가 일곱번째 난쟁이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독 사과를 먹고 관이 실려갈 때 사랑하는 공주의 얼굴을 한번 더 보려고 관 위로 펄쩍 뛰어오른 난쟁이 말이다. 그 덕에 공주 목에 걸린 사과조각이 튀어나와 목숨을 건진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공주는 죽기 직전 깨닫는다. 자신을 진정 사랑한 건 일곱번째 난쟁이었다는 걸. 유모는 물어 물어 구둣방 할아범이 된 난쟁이를 찾아낸다. 난쟁이는 꿈을 이룬다는게 무엇인지 지혜로운현자처럼 조곤조곤 우리에게 들려준다.

‘변신’은 밤마다 토끼로 변하는 아버지 이야기. 카툰을 그리며 늘 밤을 새우다시피하는 나는 어느 날 밤 아버지가 토끼로 변하는 걸 목격하게 된다. 토끼는 당근을 먹지도 놀이삼아 풀이나 짚을 기어오르지도 않는다. 토끼가 하는 일은 오로지 책을 읽는 일. 그렇게 아빠, 아니 토끼와 마주 치는 일이 많아지면서 아빠에게 말을 비로소 말을 걸게 된다. 나는 이전까지 아빠와 살갑게 말을 나눈 적이 없다. 나는 이렇게 가다간 토끼를 안아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작가는 소설이 외면당하는 시대에 독자들이 이야기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도록 짧은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기이한 이야기.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 하는 질문도 해보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독자들과 나누고 싶고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 먼저 쓰고 싶었습니다. (…) 무엇보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라는 마음이 드는 그런 글을 써보려고 했습니다.”(‘작가의 말’ 중에서)

/meelee@heraldcorp.com

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지음/창비

후후후의 숲/조경란 지음/스윙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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