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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숫자로 만나다
롯데뮤지엄서 2월 7일까지
회화·조각 등 150여점 선보여
앤디 워홀 협업작품 5작품도
전시 기획 구혜진 큐레이터
“워홀·바스키아, 예술적 동반자”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시전경. 가장 오른쪽 작품이 최고 보험료를 자랑하는 ‘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다. 추정가 약 2000억원. [롯데뮤지엄 제공]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 r a y o n, p a p e 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뉴욕, 뉴욕, 1981,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실버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콜라주, 128.3×226.1cm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 1982년 10월 4일 - 처음 만난 날. [롯데뮤지엄 제공]

요절한 천재, 검은 피카소로 추앙받는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의 개인전이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바스키아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전시다.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그리고 사진 등 150여점을 선보인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다. 한국에서 이정도 규모의 대규모 회고전은 수년내 열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스키아는 현대미술사의 중요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는 주류 미술계와 사회를 향한 강력한 저항하며 모순 투성이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조롱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뒤섞고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세기의 천재는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전설로 남았다. 오는 2월 7일이면 마감하는 바스키아전을 숫자로 정리해봤다.

▶1000000000000=1조원. 이번 전시의 보험가액이다. 150여점이 출품됐다. 이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다. 2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1981년 바스키아가 유럽 첫 개인전 출품작으로 가로 4m, 세로 2m가 넘는 대작이다. 한 남성이 소를 끌고가는 모습을 그렸다. 남성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지만, 소는 근육이 탄탄하다. 동물의 죽음을 통해 자본주의 소비사회를 비판해온 바스키아는 인간과 동물을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이번 전시작 대부분은 이스라엘 출신의 사업가이자 컬렉터 호세 무그라비(81) 소장품이다.

▶8년, 3000점=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바스키아를 위해 엄마는 ‘그레이의 해부학’을 선물한다. 장기간 병원에 머물면서 책을 탐독한 바스키아는 이후 자신의 작품에서 뼈나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특한 도상을 선보인다. 1977년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SAMOⓒ(세이모)’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이듬해 알 디아즈와 결별했으나 SAMOⓒ는 바스키아 작품에 꾸준히 등장한다.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57과 머드클럽에서 활동하던 바스키아는 1980년 제니 홀저, 케니 샤프, 키키스미스 등이 참여헌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웨이브’에 참여하며 뉴욕 화단에 등단한다.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래리 가고시안의 초대로 열린 LA개인전에서 모든 작품이 하루만에 완판됐고, ‘카셀 도큐멘타7’에 가장 어린 참여작가로 이름을 올린다. 1983년 휘트니비엔날레 참여, 1985년 앤디 워홀과 공동전시 등 뉴욕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성장했다. 1987년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죽자 그 충격으로 이듬해 약물과다로 명을 달리한다. 바스키아가 화단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건 8년 남짓, 그 사이 1000점의 유화와 2000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1982년 10월 4일=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이 만난 날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워홀이 바스키아의 엽서 등을 10달러에 사주는 등 안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예술가로 직접적인 교류는 아니었다. 1982년 10월 4일엔 바스키아가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줬다. 불과 2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벌어진 일로, 워홀은 “물감도 다 마르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1985년까지 2년간 150점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했다. 이번 전시에는 워홀과 바스키아가 함께 작업한 협업작품과 세라믹에 그린 드로잉 등 5작품이 나왔다. 세라믹 작업은 서로 잘 아는 작가나 문화계 인사를 간단히 스케치 하고 이름을 적어넣는 방식인데 백남준, 사이 톰블리 등 당시 뉴욕에서도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다. 전시를 기획한 구혜진 롯데뮤지엄 큐레이터는 “워홀과 바스키아는 예술적 동반자 관계였다. 팩토리에서 실크스크린과 복사 등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작업을 주로 했던 워홀은 바스키아와 교류이후 회화의 힘을 재발견했다”고 설명했다.

▶3000장=바스키아는 음악을 사랑했다. 3000장 이상의 앨범을 모았고, 직접 클럽에서 디제잉을 할 정도로 음악에 빠져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계의 정체성에 뿌리를 둔 재즈를 좋아했다. 바스키아의 뮤즈였던 마돈나는 “바스키아는 미술이 엘리트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싫어했다. 그는 나를 부러워했다. 음악은 더 많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라고 회상한다. 바스키아는 음악이 시 같은 운율에서 리듬이 형성되는 방식을 착안, 회화작업에 반영했다. 전시에는 ‘무제-소피스티케이티드 레이디(Untitled-Sophisticated Lady)’(1987)등 존경했던 작곡가를 작품에 반영했다. 재즈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듀크 엘링턴의 동명 작품을 참조한 것으로, 작품 오른쪽에는 엘링턴의 다른 노래 제목과 가사들이 음표처럼 써있다. 바스키아가 좋아했던 뮤지션들은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등이 있다. 이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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